[사진-상병수당 시범사업 실시 지역. 출처-국민건강보험]
[사진-상병수당 시범사업 실시 지역. 출처-국민건강보험]

[이코리아] 아프면 쉬는 건 당연한 권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직장갑질119 온라인노조가 25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직장인 10명 중 4명은 아플 때 유급 병가를 쓰지 못한다. 최근 1년 내 유행성 질환에 걸렸던 직장인 절반도 감염 당시 쉬지 못했다고 답했다. 중소기업, 비정규직, 여성, 저임금 노동자일수록 병가 제도의 보호에서 멀어지는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

‘아프면 쉴 권리’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노동자가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일을 못 하는 동안 고용 불이익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권이다. 이는 건강권이자 인간의 존엄과 직결되는 생존권으로, 선진국 대부분은 이를 보장하기 위한 상병수당 제도를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제도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공무원이나 일부 공공기관 종사자처럼 법적으로 유급 병가가 보장되는 예도 있지만, 민간기업,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병가 사용률이 절반 수준에 그친다. 사업장 내 별도 규정이 없는 경우 병가는 무급 처리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때문에 아플 때 쉬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공 제도의 도입 요구가 커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22년 업무 외 질병에 대해 일정 기간 휴가·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를 추진할 것을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산재’가 일하다 다쳤을 때를 보호하는 제도라면, 상병수당은 일 외의 질병으로 일을 못 할 때를 위한 장치다. 고용보험, 건강보험 등 기존 사회보장 제도와 연계해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세계 각국은 상병으로 인한 소득 손실을 개인이 감당하지 않도록, 공공보험을 통해 일정 수준의 소득을 보전해주는 ‘상병수당 제도’를 법제화해 운영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 자영업자,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까지 포괄할 수 있도록 적용 범위를 넓히는 추세다.

캐나다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병가 수당 제도를 대폭 개편했다. 고용보험(EI)에 가입된 노동자는 질병이나 부상으로 일하지 못하면 최대 26주간, 통상 임금의 55%를 수당으로 받을 수 있다. 2022년부터는 기존 15주였던 지급 기간을 26주로 연장하고, 자영업자도 신청할 수 있도록 범위를 확대했다.

독일은 상병수당 제도가 노동자의 건강과 고용을 보호하는 핵심 제도로 정착돼 있다. 사회보험에 가입한 모든 노동자가 상병수당을 받을 수 있으며, 초기 6주간은 고용주가 임금의 100%를 지급하고, 이후 최대 78주까지는 건강보험공단이 평균임금의 약 70%를 수당으로 지급한다. 수급 절차도 다낭 카지노 슬롯 머신적 간단해, 의사의 진단서만 제출하면 된다.

고용주가 부담하는 초기 6주의 100% 임금은 정부가 직접 보전하진 않지만, 소규모 사업장을 위한 보완 장치는 있다. 직원 수 3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고용주가 분담금을 매월 내면 병가로 인한 임금의 60~80%를 건강보험공단에서 환급받을 수 있다. 이는 노동자를 생산수단이 아닌 '인간'으로 존중하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원칙에 기반한 제도 설계다.

영국은 일정 금액의 법정 병가수당(SSP)을 최대 28주간 지급하고, 프랑스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최대 3년까지 병가수당을 지급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상병수당을 공공보험에 연계해, 일정 기간 이상 일한 모든 노동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방향으로 설계돼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22년부터 6개 지자체에서 상병수당 시범사업을 시작했으나, 전국 단위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는 만 15세~65세 국민 중 고용보험 가입자 등을 대상으로 하루 4만3,960원을 최대 90일까지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중소사업장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자영업자 등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다.

이런 가운데 일부 지자체는 제도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자율적으로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는 지난 22일, 상병수당 제도를 모든 시민으로 확대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달 말부터 시행되는 3단계 시범사업 개선안에 따라, 만 15세~64세 이하 전주시민이면 누구나 상병수당을 신청할 수 있다.

특히 이번 개선안에서는 소득 인정액 기준이 폐지돼 사실상 모든 취업자가 지원 대상이 된다.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경우 신청인의 직전 3개월 평균 보수월액을 기준으로 하루 4만8150원에서 최대 6만6000원까지 수당이 지급된다.

직장갑질119의 조사에 따르면, 상병수당 전면 도입에 대해 응답자의 80.6%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아프면 쉬기 어려운 구조’는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집단 감염과 같은 공중보건 위협으로도 이어질 수 있어 사회 전체에 리스크로 작용한다.

전문가들은 “중소기업이나 민간부문에 병가 제도를 의무화하기 어려운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공공이 개입해 상병수당을 보편적으로 운영할 필요성이 매우 크다”라고 지적한다. 특히 전염병 대응, 인구 고령화, 삶의 질 향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고려할 때, “‘아프면 쉴 권리’는 선택이 아니라 시민의 기본권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