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롯 777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누리집
=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누리집

[이코리아] 2025년 올해는 을사늑약 12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이코리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한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며, 특히 6월 6일 현충일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날이다. 이에 <이코리아>는 목숨을 걸고 무장 항쟁에 나섰던 192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 슬롯 777과 그 중심 인물들을 재조명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비폭력 저항의 한계를 절감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무장 투쟁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약산 김원봉(1898~1958) 선생은 같은 해 11월 중국 난징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결성 초기부터 "민족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근본적으로 타도한다"는 강령 아래,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각지 경찰서를 주요 타격 대상으로 삼았다. ‘칠가살(七可殺)’로 불리는 암살 대상 리스트에는 조선총독, 고등경찰 책임자, 친일파 인사들이 포함되었으며 평범한 일본인 등 민간인들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 = 슬롯 777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누리집
약산 김원봉 선생 = 슬롯 777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누리집

김원봉 단장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18년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하며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했고, 길림과 서간도 등지를 거치며 폭탄제조법을 익히는 등 일제에 맞선 무장투쟁을 본격화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을 역임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했다.

1926년에는 무장 슬롯 777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황푸군관학교에 입소하여 정규 군사 교육을 받고,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그는 1929년 상하이에서 정치학교를, 1932년에는 난징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했다.

1938년에는 장제스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에는 백범 김구와 함께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발표하며, 각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과 단일조직화를 호소하는 등 임시정부 및 중국 국민당과의 합작을 이어갔다.

광복 후 김원봉 단장은 군무부장 자격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귀국했으며 좌우합작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나, 여운형 선생의 암살과 단독 정부 수립 분위기 속에서 결국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고위직을 역임했으나 1958년 정치적 숙청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월북 전력으로 인해 김원봉 단장은 아직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19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 단장을 거론하자 정치권 일각에서 이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해 “공로와 과실은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과 “자료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이념 논쟁의 희생자”라는 시각이 엇갈리는 등, 그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박재혁 의사는 부산 범일동 출신으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상해와 싱가포르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던 인물이었다.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이후 1920년 8월 상해에서 김원봉 단장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고,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 해 9월 군자금 300원과 폭탄을 받아 귀국했으며, 9월 14일 고서에 관심이 많았던 경찰서장을 노려 고서 더미 속에 숨긴 폭탄을 들고 서장을 만나 대화를 하던 중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며 “나는 상해에서 왔다. 너는 조선 민족의 원수다”라고 외친 뒤, 탁자 위에 폭탄을 던졌다. 서장은 부상을 입었고, 박재혁 자신도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됐다.

박 의사는 혹독한 고문과 병세 악화 속에서도 당당히 법정에 섰으나 1921년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고, 형 집행을 기다리며 단식 투쟁 끝에 스물일곱의 나이에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나석주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친일 주재소장과 면장을 사살하는 등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1920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과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1926년 봄, 성균관 출신 유학자 김창숙이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은행을 폭파하라”는 지시와 함께 자금을 제공하자, 나석주 의사는 이에 응답해 국내 진입을 결심했다. 그는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해 인천항을 통해 밀입국했고, 사건 당일 오후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되자 곧바로 동양척식회사로 향했다. 그는 기자 신분으로 근무하던 직원을 사살하고, 사무실 직원과 기술과장을 저격한 뒤 폭탄을 던졌으나 이 역시 불발됐다.

이어 그는 조선철도회사 정문 경비와 인근 시민을 쏘았고, 마지막으로 경기도 경찰부 소속 경부를 사살한 뒤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2천만 민중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라고 외친 뒤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쏘았다. 이후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아 경찰이 이름을 묻자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4시간만에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나석주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김익상 의사는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와 기계감독으로 일하다, 1921년 김원봉 단장의 밀명을 받고 의열단에 입단했다. 그는 같은 해 9월, 전기 수리공으로 위장한 채 조선총독부에 침입해 폭탄을 투척했다. 2층 비서과에 투척한 폭탄은 불발됐지만,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했다. 거사 직후 그는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이듬해 3월에는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는 작전을 수행했다. 동지 오성륜과 함께 계획을 세운 그는, 1차 저격이 실패하자 폭탄과 권총으로 2차 공격에 나섰으나 이 또한 불발로 끝났다. 거사 직후 중국 경찰에 체포된 그는 나가사키로 압송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이후 1936년 출옥해 귀국했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생사가 불분명해졌다. 슬롯 777지사 이강훈의 증언에 따르면, 연행 도중 한강에 투신해 순국했다고만 전해진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한편, 최근 영화 <밀정> 속 등장인물 ‘루비크’의 모델이 된 의열단에 폭탄을 제공한 헝가리인 기술자 '마자르'의 실체가 밝혀졌다는 주장이 나오며 화제가 되었다. 지난 5월 31일 경향신문의 단독보도에 따르면, 의열단의 무장투쟁을 도운 폭탄 제조 전문가 ‘마자르’의 본명이 '가보르 요제프 마자르(Gábor József Magyar)'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서울대 김태웅 교수와 전 주한 헝가리 대사 초머 모세 교수는 헝가리 외교·국방부 문서를 토대로 마자르의 신원과 행적을 추적했으며, 그 결과 1896년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역인 셸메츠바녀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몽골로 유입됐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는 이태준 선생을 통해 슬롯 777과 연결됐으며, 상하이 등지에서 폭탄 300여 발을 제조해 국내로 밀반입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3년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투척한 폭탄 역시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이후의 행적은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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